나는 지난 달 공기업 취업을 했고, 임용까지 약 한 달 간의 기간을 보내는 중이다. 이 기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마음 같아서는 인턴을 그만두고 오랫동안 꿈꿔왔던 유럽이나 미국, 캐나다 여행을 가고 싶었다. 하지만 장기 여행을 가기에 최적인 시간임에도 돈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로 일찌감치 접었다. 취업은 했지만, 다른 곳으로 갈 가능성도 열어뒀기에 (정확히는 원래 목표가 있어서) 공부도 계속 하고 싶고, 지금 일하는 회사에서 돈을 벌며 공부를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국내나 근교 해외여행 같은 것은 휴가 써서 나중에 얼마든지 갈 수 있다고 생각했고, 없는 돈을 쪼개서 굳이 지금 가고 싶지 않았다. 백수 시절이 길었기에 휴식이나 노는 것에 대한 미련도 크게 없었다. 다만 당일로 놀이공원이나 서울을 갈 계획이 있었는데 이것은 주말을 이용하면 되기에 굳이 일을 그만둘 필요는 없었다. 평일에 가면 더 여유롭겠지만, 그만큼 급여가 줄어드니까 그렇게 하기는 또 부담스러웠다.. 생활비 외에도 병원비(ㅂㄷㅂㄷ), 이벤트비, 폰 구매 등 큰 돈이 나갈 일이 많아서 재정 상황이 넉넉지 않고.. 그냥 특별한 계획이 없으면 일을 계속 하는 것이 좋은 것 같았다.
한 마디로 돈이 없어서 임용 직전까지 인턴을 그만두지 않고 있다는 소리다. 늦게 대학을 가고, 늦게 졸업을 하고, 그 이후로도 긴 방황과 여러 시행착오로 모든 게 늦었다.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땐 온전한 기쁨보다 벼랑 끝에서 살아난 듯한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취업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사람'이라는 자격을 부여받은 듯했다. 누구에게도 빚지지 않고,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복잡한 세상 속에서 한 사람의 몫을 할 수 있다는, 큰 이변이 없으면 평생 굶어 죽지는 않는다는 그런 것. 거리를 지나다니는 보통의 사람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 외딴 섬이 아니라 세상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것. 매일 일어나서 갈 곳이 있는 것. 누군가를 만날 때 떳떳해질 수 있다는 것. 마음 한 켠에 걸리는 것 없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것. 취업이, 아니, 직업인이 주는 힘은 정말 크다. 개인의 생계와 자존감의 원천이 되니까.
또래보다 늦은 취업, 얼떨결에 운 좋게 한 취업.. 좋으면서도 기분이 이상하다. 내가 일을 잘 할 수 있을까, 적응을 할 수 있을까, 1차적인 문제가 해결됐으니 해보고 싶었던 것에 도전해야지.. 돈을 열심히 모아서 집을 사야지.. 등 여러 가지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괜히 서글픈 마음이 올라온다. 늦게 취업해서 떠들썩하게 주위에 취업 소식을 전하고 파티를 하는 것도 아니고(고시 합격한 것처럼 대단한 것도 아니고), 취업했으니 당장 하던 일을 그만두고 마음껏 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짧게 정리하면.. 돈도 없고, 친구도 없고, 지식도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어느새 나이는 나이대로 먹었는데, 또래가 열심히 돈을 모으고,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자기계발을 하며 삶을 알차게 살아가는 동안 나는 뜬구름 잡는 목표와 게으름으로 모든 걸 낭비한 것만 같다. 자그마치 10년. 최소 5년. 더 최최소 3년. 앞으로의 삶을 계획하고, 저축이나 재테크 등 현실적인 지식을 찾아보고, 폰의 연락처를 볼 때마다 느낀다. 정말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아무것도 없구나. 취준이라는 말로 제쳐두었던 모든 것들이 하나 둘씩 떠오른다. 그 동안 내가 놓친 많은 것들이. 나이는 상관없다고, 어리다는 허울 좋은 말이 때로는 무책임하게 느껴진다. 인생에 있어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사회초년생으로 회사의 신입이 되기에 어린 나이는 아니다. 취미가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한 행위에는 내 능력을 필요로 하는 수요가 있어야 한다. 그들이 내 나이를 문제 삼는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외에 시험 준비, 결혼, 육아 등 사회의 보편적인 기준을 어느 정도 따르는 게 좋은 과업들이 있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며 호기롭던 시절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세월의 흐름과 사회의 보편성에는 그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나이에 관해서도 많은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사실 내가 위에서 언급한 문제들은 그리 큰 것도 아니고, 평소에 크게 느끼지도 않는 것들이다. 의도적으로 친구 관계를 축소한 것도 있고, 취준 생활이 길어지다보면 인간관계가 좁아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취업을 하면 멀어졌던 친구와 다시 가까워질 기회가 충분히 있고, 새로 생기는 관계도 많을 것이다. 친구란 게 원래 가까웠다가 멀어졌다가 하는 거고, 내가 잘되면 어차피 다 연락이 오게 된다는 게 맞는 말이다. 내가 가치가 있으면, 인맥은 자연스럽게 생긴다. 물론 친구(지인x)가 가치 따라서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것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의미까지는 아니고 내가 안정돼야 주위 사람과 교류할 수 있는 여건이 된다는 정도로만 이해해주길.
돈은, 사실 빚이 없는 것만으로도 큰 다행인 것이다. 정식으로 취업을 한 적이 없기에 주기적으로 돈을 모으기도 힘들었을 것이고, 작사학원이나 공부 등 여러 가지에 투자한 비중이 높았다. 당장 돈을 조금 더 모으기보다는 장기적인 가치에 투자한다고 한 건데, 그 만큼 열심히 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기는 하다. 성과도 당연히 안 나왔고. 아무튼 n수와 n년 간의 서울 살이, 기타 여러 이슈로 돈이 들 일이 많았음에도 아주 운 좋게 빚이 없다. 제로베이스니 이제부터 모으면 된다. 솔직히.. 사회초년생 월급으로 저축이나 투자할 생각하니까 앞이 많이 깜깜하기는 하다. 서울에 가고, 자취를 하면 더 힘들텐데, 매달 학원을 다니게 되면 훨씬 더 힘들텐데.. 사람들은 어떻게 돈을 모으는 걸까 싶기도 하고.. 입사하기도 전에 숨통이 조여오는 느낌이 들기는 하다. 상금이 나오는 공모전에 도전해야 하나? 이벤트에 응모해야 하나? 여러 생각이 든다. 그래도 정기적으로 수입이 들어오고 해가 지날 수록 조금씩 오를 테니까, 아직 얼마 들어오는지도 정확히 모르니까, 다니면서 방법을 찾아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생각하는 중이다.
지식.. 생활 지식은 정말 없는 것 같긴 하지만, 학문적 지식도 딱히긴 하지만.. 그래도 서울 (중)상위권 대학을 졸업하고, 공부한 것에 비해서는 ncs도 괜찮게 나오고, 일반상식도 통과했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아주 나쁘지는 않지 않나? 비록 19살 때와 비교했을 때 영어 실력도 제자리이지만.. 요리를 좋아한다면서 할 줄 아는 요리도 없고, 물건을 잘 고치지도 못하고, 금융이나 재테크, 경제 지식도 전무하지만.. 세계사도 시사도 모르지만.. 부족한 부분은 지금부터 조금씩 메꾸면 되는 것 아닐까? 경험이 없어서 부족한 지식은 경험으로 채우다 보면 자연스레 쌓이게 되겠지. 사실 여기서 현타가 많이 온다. 내 나이라면, 사회생활 경험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이라면 응당 알 법한 예절과 처세술이 부족한 것 같아서. 친목을 위주로 하는 가벼운 목적의 관계에선 문제 없지만 비즈니스 관련 만남이나 처세는 정말 어렵다. 너무 과하진 않을까, 또는 무례해보이지 않을까.. 어느 정도의 선을 지켜야 하고, 어느 정도로 예의를 지켜야 할까. 모든 게 어렵다. 인사부터 명함예절, 옷, 식사.. 압존법이 아직 있을까? 등등.. 더불어 지위가 높은 사람이 무례하게 할 때는? 무례한게 맞는건가? 내가 오버하는 건가? 쓰다보니까 그냥 혼자 일하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순 없으니까 어떻게든 잘 적응해야지. 나이 많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이런 부분이 가장 신경쓰이긴 한다. 어리면 '어려서 잘 모르겠지' 또는 '어린데도 잘 하네'가 되는데 나이가 있으면 '나이가 몇인데 이것도 몰라?'가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사실 참 부담이 된다.... 하지만 어떡해 해내야지ㅠㅠ
위와 같은 생각들로 마음이 복잡하다. 어찌보면 배부른 고민인데, 사실 크게 고민거리도 아니다. 딱히 선택의 갈림길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열심히 배우고 경험하고 채우는 수 밖에 없으니까. 크게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치만 그냥 마음이 심란한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지금도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이 많아서 이게 맞는지 모르겠다. ncs와 행정학은 조금 미루고 있는데 컴활을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고. 다음 달에는 토익을 쳐야 하고, 그 다음에는 돌아온 한능검과 한국어 시험을 칠 예정이고. 작사도 다시 시작하고 싶고. 경제와 금융 공부도 틈틈이. 한자와 영어 회화(스피킹 시험). 운동도. 요리도. 운전도. 10년 째 목표와 위치가 제자리다. 욕심을 버리고 하나씩, 하나를 하더라도 제대로 하고 싶은데 쉽지 않다. 그래도 해야지.. 해내야지.. 뭐라도 하다 보면 뭐라도 되어있겠지..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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